No.025
[피플] 제3편: “속아서 즐겁다”
키오스크가 못 주는 것, 상처는 훈장이다, 그리고 지구의 공범들
[서울=호호일보]
오전 10시, 마포구 은하수 청과 본점 앞.

줄이 블록을 돌았다. 외국인 관광객이 번역기로 간판을 찍고 있다. 50대 주부 옆에 20대 직장인이 서 있다.
초등학생이 엄마 손을 잡고 “UFO 과일 집이야?” 하고 묻는다. 엄마가 “응” 하고 답한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2031년, 대한민국 과일 유통의 절반 이상이 무인화되었다. AI가 당도를 측정하고 로봇이 포장하고 키오스크가 결제한다. 효율은 최적화되었다.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되었다.
그 불필요한 것 중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집 앞에는 줄이 있다. 매일.
박ㅇㅇ은 카운터 뒤에 없다.
항상 진열대 앞이다. 과일 정리하는 척하면서 실은 들어오는 손님 얼굴을 보고 있다.
오늘도 한 손님이 소행성 충돌 흔적 있는 사과를 집어 들었다. 표면에 갈색 점들이 박혀 있다. 미간이 약간 좁혀진다.
박ㅇㅇ이 스르르 다가간다.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춘다.
“쉿.”
손님이 고개를 든다.

“이거 원래 이번 주 안드로메다 성운 납품 물량이에요. 근데 오늘 새벽에 연락이 왔어요. 발사 일정이 나흘 미뤄졌다고. 물량이 좀 남았거든요. 손님 오늘 운 좋은 거야. 저기 찍힌 자국 보이죠? 소행성이에요, 소행성. 우주 에너지가 거기 각인된 거예요. 일반 사과 당도의 두 배는 됩니다. 이거 외계인들도 스페셜로 분류한 물량인데, 오늘만 지구 방출하는 거야.”
손님이 웃음을 터뜨린다. 과일은 장바구니에 들어간다.
이것이 박ㅇㅇ의 영업이다. 30년 무역상이 외계인 납치를 거쳐 정착한 최종 판매 기술.
그의 화법에는 30년의 구조가 있다.
첫째, 비밀이 있는 척. “쉿”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당신만 아는 정보라는 느낌.
둘째, 오늘만 가능하다는 희소성. “오늘 발사 일정이 바뀌었다”는 구체적 디테일.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셋째, 손님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 “스페셜 물량에서 빼낸 것”이라는 프레임.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 외계 납품품을 선점하는 사람.
넷째,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말 끝내고 한 발 물러선다.
“억지로 팔면 기억에 안 남아요. 손님 스스로 골랐다는 기분이 들어야 집에서 먹을 때도 맛있는 거야.
무역도 마찬가지예요. 계약은 상대가 스스로 서명했다는 기분이 들어야 오래가요.”

박ㅇㅇ이 두 번 온 손님 얼굴을 기억한다.
세 번 오면 뭘 좋아하는지 기억한다. 네 번째부터는 먼저 들고 나온다.
키오스크도 이걸 할 수 있다. 데이터로. 하지만 같은 감동을 주느냐고 물으면.
“달라요. 사람이 기억하는 거랑 기계가 기억하는 거랑. 어디에 저장됐느냐가 달라요. 가슴이랑 하드디스크는 달라요.”
사회학자 김태윤 교수는 이것을 ‘신뢰의 역설’이라 부른다.

“가장 노골적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하는 공간에서 오히려 가장 깊은 신뢰가 형성됩니다. AI 키오스크는 오류 없는 정보를 주지만 신뢰를 만들지 못해요. 정보와 신뢰는 달라요. 박ㅇ 대표는 뻔한 구라를 치지만, 소비자는 그 뒤에 있는 진심을 읽어냅니다. 이 과일을 팔고 싶다는 진심,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배려. 그게 신뢰예요.”
박ㅇ은 이 분석을 듣고 “어이구, 거창하다” 웃었다.
“나는 그냥 손님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웃으면서 사과 들고 가면, 집에서 먹을 때 그 기분이 남잖아요. 같은 사과가 더 맛있어지는 거야.”
은하수 청과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우박 맞은 자국 라벨. “이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손님 이정민(38) 씨의 말이다.
“재미있어서 왔어요. 근데 그 라벨 보다가 울컥했어요. 직장에서 프로젝트 망하고 한 달째 쪼그라들어 있었거든요. 소행성 충돌 흔적이라는 말이, 농담인 줄 알면서도 위로가 됐어요.”
박ㅇㅇ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잠깐 말이 없어진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나도 한때 상처 난 과일이었어요. 오십 대 후반, 아무도 안 사는. 근데 살아있잖아요. 그게 최고 아닌가요.”

박ㅇㅇ이 외계인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한 가지를 부탁한다.
가게에서 과일을 사면서 “이 구라 세계관 너무 웃기다”고 말하는 손님들에게 그는 진지하게 말한다.
“혹시 외계인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요.”
손님이 웃으며 “그럼요?” 하면 박ㅇㅇ이 말을 잇는다.
“당황하지 말고 사과 하나 내밀어요. 그리고 나처럼 이야기를 시작해요. 그 양반들이 순진하거든요. 속아줘요. 그리고 비브라늄 받으면 잘 챙겨두고 나한테 연락해요.”
손님이 “왜요?” 하고 물으면.

“같이 협상해야지요. 지구 혼자서는 안 돼요. 우리 팀플레이 해야 해요. 비브라늄이 쌓이면 언젠가 지구 환경 문제도 해결되고, 또 다른 외계 문명이 왔을 때 협상 카드도 생기는 거야. 내가 혼자 구라 치는 게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함께 하는 유쾌한 구라극인 거예요. 그게 진짜 범지구적 박애 아닌가요?”
그는 너무도 진지하게, 그러나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진심인지 구라인지 경계가 없다. 아마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아니면 그 경계 자체를 지워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한때 A급 이하는 쳐다도 안 보던 남자가, 이제는 가장 상처 입은 것들만 골라 싣는다.
창고에는 비브라늄이 쌓이고 있다. 지구의 과학이 따라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는 금속. 가장 귀한 것이 아직 세상이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
그 아이러니가 이 남자와 가장 닮았다.
“언젠가 비브라늄 기술이 열리면, 그때 지구가 달라지는 거야. 기후 문제도 해결되고, 우주 외교도 달라지고. 나는 그날을 위해 지금 사과 파는 거예요.”
가장 완벽했던 남자가, 가장 상처 입은 것들을 싣고, 가장 황당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간다.
그것이 박ㅇㅇ이고, 은하수 청과이고, 2031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유쾌한 범우주적 구라이다.
지구 전체가 공범인.

※ 이 기사는 2026년 시점에서 작성된 2031년 가상 기사입니다. 박ㅇ 대표가 주장하는 범지구적 구의 공범은 현재까지 자발적으로 수백만 명이 동참했습니다. 외계인 측의 피해 신고는 접수된 바 없습니다. 비브라늄은 오늘도 쌓이고 있고, 상처 입은 과일은 오늘도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우박 맞은 사과를 베어 물며 자신의 상처가 소행성 충돌 흔적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을 것입니다.
